시간이 정지한 세계

 문은혜는 올해 2047년, 중학교 2학년 학생이다. 은혜의 가족은 며칠 전 서울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새워진 신형 돔도시로 이사 왔다. 은혜는 돔도시로 이주하며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싫었고, 이런 도시에 이사를 들어갔다가 알 수 없는 말썽에 휘말리는 SF영화의 주인공처럼 괴물과 싸워야 될까 봐도 무서웠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사를 가지 말자고 엄마아빠에게 무척 졸라댔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침이 도시 내 모래바람과 미세먼지 때문이라는 알게 된 후, 또 이 문제는 매해 심각해 질뿐 전혀 좋아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 은혜의 투정 어린 말투는 갑작스레 어른의 세계로 이사 온다. 밤새 계속된 아버지의 기침 소리에 스스로 ‘우리 이사가요! 저도 이사 가고 싶어요!’라고 개인의 이기심에 반하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다. 

눈물 콧물 흘리며 이사를 온 첫날은 은혜의 일생에 가장 잊지 못할 날이었다. 돔도시 내에 전기자동차를 타고 집에 도착하기 까지 목격한 광경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놀이동산에 갔었을 때 느꼈던 것을 훌쩍 뛰어 넘는 전율이었다. 홀로그램은 이미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기술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도시 전체를 수놓고 있는 광경은 처음이었다. 

홍콩의 빌딩 숲처럼 빼곡한 건물들 사이에, 그리고 돔도시와 바깥세상의 경계 돔 벽 전면에 대형 홀로그램으로 드로잉 된 파란 하늘과 많고 다양하고 화려한 식물 숲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단아한 꽃들에서부터 아마존의 기이한 식물들까지, 원색, 파스텔, 형광의 색을 품은 자연 형상물들이 회색 빌딩숲을 얼기설기 감싸며 한번도 보지 못한 이국적인 신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은혜는 눈 앞의 신세계에 호흡이 가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아이들은 가장 높은 빌딩 옆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공룡 홀로그램을 가장 좋아했지만, 여자아이들은 ‘빌딩 숲 사이 공원’(digitally puffed small parks in between buildings)을 뛰노는 윙크하는 사슴들과 다람쥐들을 더 좋아했다. 다른 여자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다람쥐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은혜였지만, 그래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홀로그램 놀이터는 *홀로백리버(Holoback River)이었다. 은혜는 옛날에 사람들이 강이나 바다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엄마 아빠에게 들은 적이 있다. 마치 빨래를 할 때 옷이 젓는 것처럼 옷이 젖고, 목욕할때처럼 물보라를 치고, 수영장에서처럼 수영을 했다는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 회색 강과 바다에서! 그런데 이 강의 색깔은 수영장 물보다도 파래서 호감이었고, 강에 뛰어들어도 옷이 젖지 않으니 불편할 일 없었고, 무엇보다 엄마 아빠의 어렸을 적 추억을 공유하는 것 같아 기뻤다. 그러나 첨단 기술 세상 속에서만 누릴 수 있었던 경험들은 엄마 아빠의 것과는 다른 변주였다. 이 강안에서 물고기들과 직접 눈맞추고 인사할 수 있었고 몇 개의 사인을 그리는 손짓만으로 그들에게 먹이를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한 시간에 한번씩만 등장한다는 죠스를 기다려볼 참이다. 나타나는 홀로그램 죠스는 그냥 헤엄쳐서 강을 가로지른다고는 하지만 그가 등장할 때 흐르는 음악만은 정말 두근두근하고 섬찟했다. 

오늘도 학교가 끝나고 아이들과 물놀이를 하며 이런 저런 수다를 떠는데, 돔도시 천정에 작렬하던 스크린 태양이 석양에 물들며 그 위로 철새 무리들이 지나가는 영상이 흘러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은혜는 ‘이제 5시가 되었구나!’라고 말하며 친구들과 헤어질 준비를 한다. 은혜뿐만 아니라, 돔도시 대부분의 주민들은 바로 이 시간을 기점으로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직장인들은 *4D 네트워크를 끄는 것으로 퇴근을 준비하고, 주부들은 전국 맛집리스트에서 원하는 메뉴를 골라 그 식당에 로열티를 제공 한 후 가정용 3D프린터로 음식을 출력하며 밥을 차리고, 아이들은 저녁을 먹은 후 홀로그램 학원에서 모인다. 철새처럼 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 한 박자 늦게 남겨진 은혜는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홀로백리버 영역을 한참 벗어나자 은혜 옷에 붙어 있던 홀로그램 꽃잎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기침도 이런 환영에 지나지 않았으면.’ 아직 어린 은혜는 마음 속으로 어른의 말을 그려본다.   

이번 주 토요일은 은혜의 진학 문제로 인공지능시대 전문교육자라 하는 엄마 친구분을 함께 만나기로 했다. 은혜는 ‘어렸을 때가 진짜 좋았는데, 이제 어른 되려고 별 걱정을 다해야 되나 보다!’라고 중얼거렸다. 아직 아이였지만 다른 모든 인생들처럼 하나 둘씩 현실적인 문제들을 직면하고 풀어가며 성장해야 하는 시기에 접어든 것이다. 은혜는 본능적으로 엄마 아빠의 보호가 하나 둘씩 물러가고 스스로 발을 내디뎌 걷기 시작해야 한다고 깨달았다. ‘어릴 적에는 모든 것이 이불 속처럼 따스했는데, 모든 것이 안전하다고 느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따스하지만은 않았다. SF세상 속으로 이사 들어온 날의 전율도 자극적이었으나 따스한 감동은 없었고, 대단한 홀로그램 강에서 놀이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미 있었지만 이사오기 전 친구들과 마주잡으며 전해지던 손의 따스한 온기는 없었다. 은혜는 결국 어른이 되는 것은, 변화하는 것은 차갑고 추운 감정과 결부되는 것이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춥다, 이불 어디 있지?’ 은혜는 알 수 없는 한기를 덮어보려 한다. 

전기차로 약속장소의 입구에 도착해보니 ‘시간이 정지한 세계'라는 갤러리 간판이 보였다. 은혜는 뭔가 좀 이상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생소한 입구와 아주 작은 간판이 움직이지 않아서 인 것 같았다. 돔도시 안의 대부분의 조형물과 광고물은 알록달록한 색채에 정해진 동선 안에서 움직이는 영상인데 이 건물의 간판은 스크린도 홀로그램도 아니고 무언가를  깎아 만든 수수한 조각 같아 보였다. 갤러리 안을 들어서니 이상하고 신기한 느낌은 더 강해졌다. 

전체적으로 둥그런 갤러리의 중앙에는 족히 100살은 넘어 보이는 오래된 고목이 서 있었는데 교과서에서 본 향나무라는 나무와 가장 흡사한 모양이었고 이파리들의 색상은 미술시간에 배운 색상의 이름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빨려 들어 갈 것 같은 쑥색이었다.  그 나무를 배경으로 설치된 중앙 무대에는 피아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이렇게 4명의 홀로그램 연주자들이 각각의 악기를 쥐고 있었다. 이들은 음악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누군가 ‘스톱’ 버튼이라도 누른 듯 정지해 있었다. 둥그런 갤러리 동서남북에는 촘촘히 구획된 진열대에 박제된 새, 물고기, 산호, 뿔들이 전시되어 있고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전시장의 짙은 향기가 공간을 배가시키고 있었다. 모든 것이 화려한 바깥 세상보다 왜 이 언뜻 수수한 외관의 정지해 있는 물건들이 더 시선을 잡아 끌고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까? 알 수 없는 은혜였다.   

‘돔도시에서는 이런 것들이 비즈니스가 잘되, 뭔가 좀 특이한 컨셉말이야.’ 교육자라는 은혜 엄마의 친구는 마치 세상에 관한 대단한 비밀이라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 이 시대에는 인간 손기술학과, 과학 기술과, 의과, 인공지능 융합 산업과, 이렇게 4가지가 가장 유망해. 대부분의 산업영역에서 인공지능이 인간들 할일 다 하고 있는데 뭐, 인공지능 선생님들과 홀로그램 고등학교들 때문에 이전시대 교육자들도 막 잘려나가. 은혜도 이런 거 저런 거 취향 따지지 말고 성적이 좋으면 과학 기술과나 의과에 밀어 넣고 그게 아니면 일찌감치 인간 손기술학과로 준비시켜.’

갤러리 카페에서 엄마와 친구분의 대화가 길어지자, 은혜는 관심을 갤러리의 장식품들로 돌려 이 지루한 시간을 견뎌보려 했다. 다시 다가가 하나하나 눈으로 구경하길 2번 반복하던 은혜의 마음에 갑자기 울컥하는 감정이 밀려왔다. ‘과학자나 의사가 되기에는 성적이 부족하고, 나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싫은데 인간 손기술 학과라니!’ 은혜는 그저 빨리 집에 가서 친구들과 통화하며 수다만 떨고 싶었다. 마침내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조정석에 앉아 전기차에 경로를 지시하는 사이, 뒤 자석에 앉은 은혜는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아이의 말투로 돌아간 은혜는 아기 때부터 엄마차에서 사용하던 담요를 덮고 눈을 감아버렸다. 세상만사 다시 편안해 짐을 느낀 그녀는 바로 잠에 빠졌다. 

꿈속의 은혜는 다시 ‘시간이 정지한 세계’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다만 갤러리 관람 영역 아니라 갤러리 중앙의 무대에 올라 서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뭔가 검고 가벼운 사각형의 막대기가 쥐어져 있었는데 리모콘 같았다. ‘리모콘 같기는 한데 우리집 꺼랑은 다르게 생겼네! 벽에 전시된 돌들만큼 오래 되어 보이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던 은혜는 정지된 오케스트라 연주자들과 함께 가만히 그 자리에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카페의 문이 열리고 이상한 정장을 입은 토끼가 카페를 가로질러 뛰어가며 중얼거렸다. ‘늦었다. 늦었어!’.

은혜는 외쳤다. ‘잠깐만! 기다려! 나 여기 너무 무서워! 나랑 같이 있어줘’

멈춰선 토끼는 고개를 은혜 쪽으로 돌리고 가까이 다가왔다. 누군가의 존재를 보고 안도감을 느꼈던 은혜는 갑자기 무서운 감정이 들었다. 왜냐하면 토끼의 외모가 매일 돔도시에서 만나는 윙크하는 토끼들과 매우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이 토끼는 뭔가, 나이 들어 보였다.

토끼가 말했다. ‘뭐? 무섭기는 뭐가 무서워. 네 손에 있는 리모콘 가지고 얼마든지 재미있게 놀 수 있는데. 그래도 뭐 나야 어린이들의 친구니까 네가 여기 있어 달라면 얼마든지 있어 줄 수 있지! 내 이름은 현실이야, 김현실.’

‘뭐? 김현실? 뭔 이름이 그렇게 촌스러워? 나는 은혜야 문은혜’. 은혜가 답변했다. 

‘그렇게 말하는 본인 이름도 세련되지는 않았구만 뭘. 우리 둘 다 20세기 이름이네! 여기 벽면에 전시된 박제들만큼 오래된 이름이네!’ 이런 현실이의 지적에 은혜는 할말이 없어졌다. 은혜는 잠시 엄마 아빠가 원망스러워졌다. 현실 토끼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거 네 손에 있는 리모콘 진짜 재미있는 거야. 거기 ‘재생’ 버튼을 누르면 여기 있는 물건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너랑 대화도 해줄 거야. 그리고 ‘뒤로’ 버튼을 누르면 여기 있는 물건들이 자기 과거 이야기들을 들려 주는데 너 시간가는 줄 모를걸?’

은혜는 아까 가장 신기하게 구경하던 박제된 새들을 향해 ‘재생’ 버튼을 누르고 ‘뒤로’ 버튼을 눌렀다. 그랬더니 정말 거짓말처럼 박제된 새들이 조금씩 퍼득 퍼득 날갯짓을 하다가 이윽고 자유로이 날아다니며 자신의 이야기들을 들려 주기 시작했고 은혜는 이야기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어 버렸다. 이들은 대부분 과거에 자연에서 야생으로 살았으며 오염된 환경 속에 첫 번째 생을 마감했는데, 어떤 콜렉터에게 발견되어 이런 모습으로 두 번째 생을 살게 되었다고 말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들의 이야기를 듣던 은혜는 점점 마음이 편안해 지고 무언가 위로를 얻는 듯 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은혜를 불렀다. 잊고 있었던 현실이가 자신에게 주의를 끌기 시작했다. 

‘은혜야, 언제까지 이렇게 놀고만 있을 꺼야? 너 ‘앞으로’ 버튼이 뭔지 궁금하지 않아? 네가 앞으로 버튼을 누르면 여기의 물건들이 미래의 이야기들을 들려 줄꺼야. 혹시 알아? 너의 미래의 모습도 알게 될지? 너도 궁금하지?’

은혜는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에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요 몇 일 시달리던 문제를 한방에 알아낼 수 있다는 생각과 더불어 이렇게 하는 게 뭔가 옳지 않다는 마음도 들었다.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던 아까와는 달리 은혜는 선뜻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이렇게 망설이는 은혜에게 현실 토끼는 다시 말을 건네왔다.

‘왜 그래? 뭐 안 좋은 거라도 있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안 좋은 것도 미리 봐두면 잘 대비할 수 있어서 좋지 뭘 그래. 미리 안다는 게 중요한 거야. 그리고 네가 아직 어려서 뭘 몰라서 그러나 본데, 미래를 알면 네가 나중에 시간을 어따가 투자해야 될지 알게 되는 거야. 네가 아직 세상 경험이 적어서 못 알아 들을까 봐 더 정확히 말해주는 건데, 미래를 알면 네가 나중에 어떤 주식 같은 것을 사야 될지 알게 되는 거야! 주식 말이야 주식! 들어는 봤지?’ 갑자기 쏟아지는 현실이의 말들에 은혜는 더욱 할말이 없어졌고 또 다시 멈춰선 음악 연주자들처럼 정지 상태가 되어버렸다.

‘뭐야! 진짜 답답한 애잖아! 너 겁 많고 아직 순진한가 보다. 나는 너처럼 현.실.도.피.하는 애들하고 놀아줄 시간 없겠다. 나는 다른 어린이랑 놀러 갈래!’

현실 토끼는 갑자기 등장한 그때와 마찬가지로 ‘늦었어!’를 외치며 다른 출구로 나가버렸고 알 수 없는 한기를 느낀 은혜는 곧 잠에서 깨어났다. 

집에 도착한 은혜는 옷을 갈아입다가 무언가 작고 뾰족한 물체가 주머니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정지한 갤러리 중앙 나무 주변을 장식하고 있던 돌 조각을 주웠는데 모르는 사이에 주머니에 집어 넣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컴퓨터로 섞은 향이 아니라 조향사가 직접 디자인한 자연향이라는 갤러리를 흐르던 향수 향기도 옷에 잔뜩 묻어온 것이 아닌가? 은혜는 잠시 생각했다. ‘이상하다. 분명히 나는 펜스가 쳐져 있는 그 중앙 나무가까이 간 적이 없었고 향수는 만지지도 않았는데, 그 나무와 향수 곁에서 놀았던 것은 꿈속이었는데.’ 생각이 많아진 은혜는 다시 이불을 덮고 누웠다. 요사이 경험한 이상한 요지경 세계가 은혜를 이상행동으로 유도한 것일까?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녀는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그런데 무언가 평상시와 달라진 한 가지를 느끼고 다시 일어나 앉는다. 

‘아버지 기침소리가 사라졌어!’ 

은혜는 갑자기 이불을 걷고 일어나 책상에 앉는다. 왠지 더 이상 이불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낀 그녀는 주머니에 들어 있던 돌조각을 집어 들고 관찰하기 시작한다. 노란 색 돌이라고 봤는데 빛에 비추어 보니 하얀색으로 보이고 또 묘한 빛을 발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은혜는 아버지에게 생일날 받은 무중력 액자에 돌을 넣고 조명을 틀었다. 돌조각은 3D 액자의 중심부로 부양하여 빛을 받고 단아하면서도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단 한 순간도 같은 종류의 빛은 없었다. 움직일 때마다 변화하고 달라졌다. 

‘변한다!’ 

생명이 있는 많은 것들은 이렇게 변화하고 움직이는 빛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낮에 뵌 어머니 친구라는 분의 지나치게 확언하는 미래에 대한 말도, 현실에 찌든 현실이의 유혹도 흔들림 없이 고정된 눈빛으로 모두 확실하다고 말하는 말에 불편함을 느낀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은혜가 어른으로 들어서기 위해 최근 느꼈던 고통들에는 반드시 뒤따른 보상이 있었다. 모두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전보다 조금 더 상처를 이겨낼 마음이 생겼고, 아버지의 기침도 멈추었다. 그런데 이런 인생의 과정을 겪을 필요 없이 모든 것이 정해져 있으니 정해져 있는 사실들을 거저 받으라는 말은 어린 은혜의 마음에 ‘거짓말’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은혜는 다시 눈을 들어 액자를 들여다 본다. 무한히 발하는 빛을 보며 낮에 ‘시간이 정지한 세계’에서 봤던 많은 생명체들을 추억해 본다. 한때 생명이 존재했었고 또 지금 생명이 있는 물체들이 바깥 홀로그램 세상 속 화려한 물체들보다 더 힘있게 느껴졌던 것은 조명을 받으며 내 눈으로 관찰 할 수 있었던 많은 ‘발견’에 있었고 또 하나도 서로와 같지 않았던 ‘다름’에도 이유가 있었다. 어린 은혜였지만 자신이 어른이 된다면 세상에 이런 ‘발견’과 ‘다름’을 선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다. 환경파괴와 인공지능 세상 속 더 이상 인간이 힘을 뻗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고 어른들은 말을 하지만 은혜는 무언가 자신이 또 다른 그림을 그려 볼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인간 손기술 학과에 진학해 볼까?’ 

이때 액자의 빛이 잠시나마 더 따스하게 발광하며 움직인다. 은혜의 얼굴에도 따스한 미소가 번진다. 액자를 감싼 손에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며 그녀의 손에 아직도 남아있는 향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은혜의 마음에 따뜻한 꿈이 그려졌다. 

‘자연? 향? 이런 따뜻한 감정을 만들어 내려면 어떤 과에 진학해야 하나?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알아봐야겠다’ 

은혜는 낮에 전시장에서 맡았던 장엄했던 짙은색의 자연향기가 이렇게 그녀의 작은 공간에서 마음을 덮어주는 이불 같은 향으로 변향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이런 것이 진짜구나!’ 이것은 어머니가 가정용 3D프린터로 출력해서 차려주는 밥상의 부족한 향보다, 아버지의 가정용 안드로이드 로봇 비서가 조향해서 제공하는 ‘오늘의 향’보다 살아있는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이런 진짜를 사람들에게 비추는 인간향이 되고 싶었다.  

은혜는 다시 잠든다. 이번에도 어딘가에 들어선다. 은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따듯한 이불이 되어줄,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보태줄 수 있는, 미래는 정해져 있다고 말하는 어른들의 거짓말을 덮어버릴 세상의 남은 진짜들이 발하는 ‘시간이 움직이는 세계’로 들어와 있었다. 

 

 

 

*홀로백리버(Holoback River) : 기술 ‘hologram’과 음악 ‘Hollaback Girl’ 두 단어의 합성)

*4D 네트워크 : 가정에서 홀로그램 사무실에 접속하여 함께 일을 하는데 이때 동료들의 움직임과 호흡을 감지하는 기능이 추가되어 현장에서처럼 긴장감을 유지하고 일하도록 디자인된 기술

 

글: 정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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