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흔적

 오전 8시, 그도 여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눈을 뜬다. 토스트에 시리얼, 그리고 우유한잔 그의 아침은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닮아 있다. 그러나 그의 직업은 다른 사람들과 사뭇 다르다. 그의 업무의 종착역에는 누군가의 목숨이 결론으로 쥐어진다. 그에 의해 누군가는 목숨을 건지고, 누군가는 목숨을 잃고 또 누군가는 목숨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한다. 그는 의사가 아니다. 그는 소방관도 아니다. 그는 경찰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누가 신(God)의 흉내를 낸단 말인가? 흑(黑, Darkness)의 기사인가?

 

  오전 10시, 그는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신발에 묻어 현관에서 털어버리면 공중에 흩어지고 마는 정도의 존재는, 함께, 반죽되어, 그리고 어마어마한 불을 만나 형질이 바뀌며 한때 문명의 흥망성쇠의 주인공이었던 도자기로 바뀐다. 흔히들 도자기를 숨을 쉬는 그릇이라 말한다. 세상 어디에도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되는 직업을 가진 그는 이 유일한 통로로 자신의 흔적을 남기며 숨을 쉰다.

오후 12시, 그는 책장에서 책을 한 권 뽑는다. 아무데나 페이지를 연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하는 유일한 즉흥적일 행동일 것이다. 매사에 주의를 기울이고 조심스러운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가 현대 사회의 법이 구성되기 훨씬 이전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훨씬 떠들썩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미인을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하던 그런 시대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어둠에 가려 살지 않고 영웅으로 칭송 받았을지도 모른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받은 데로 되갚아 주던 시절이었더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가 서있는 이곳은, 전혀 다른 세상(Modern world)이다. 이곳은 몇몇의 영웅이 아닌 시스템(Social system)이 결정한다. 이러한 시스템 밖에 살고 있는 그의 존재를 감사히 여길 사람은 없다. 그래서 그는 어둠 속에 산다. 장소의 어두움, 관계의 어두움, 감정의 어두움으로 보호색을 입는다. 그는 무심코 연 페이지에서 어떤 단어를 발견하고 페이지를 덮는다. 명상을 하며 그 단어가 자신에게 어떠한 암시도 되지 않도록 머릿속에서 흔적을 지운다. 흑(黑, Emptiness)으로 지운다.

오후 2시, 점심을 먹는다.

오후 4시, 업무를 본다.

오후 6시, 해가지는 냄새를 맡는다.

오후 8시, 아침에 눈을 뜬지 시계 한 바퀴를 돌아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돌아본다. 오후 8시는 그가 흔적을 지우는 시간이다. 그의 손가락에서 새로 돋아나는 지문을 갈아 지우고, 혹시라도 필체를 남긴 것이 없는지 찾아본다. 그리고 세제로 군데군데 청소를 한다.

오늘은 가마에서 구워 유약까지 발라 잘 말린 도자기 작품들을 정리하는 날이다. 매일 하루의 끝에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남자의 도자기 작품에는 가장 강렬한 그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심지어 어떤 작품들에는 그의 손자국이 남아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컵을 ‘쥐어’ 손의 흔적을 남긴 것도 있다. 그러한 행동을 통해 그가 무엇을 원한 것인지 혹은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저 철저한 흑(黑, Veil) 속에 존재하는 그도 결국에는 인성(Being human)에서 완벽히 자유롭지는 못한 인간에 불과하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 아닌지 추측할 뿐이다.

남자는 그 동안 흙으로 만든 자신의 분신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부쉈다. 그렇게 흔적을 남기고 지우고의 삶을 살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오늘 그 분신들을 부수지 않기로 결심한다. 바로 내일, 매우 다른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작품들을 인사동의 한 도자기 가게 앞에 두고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슨 의식이나 치르는 것처럼 신발의 흙을 털어 버린다. 그렇게 흑(黑, Anonymity)에서 시작된 그의 존재는 흙의 흔적(Tracks)으로 남아 분리되었다.

그리고 익명의 예술가의 정체는 흙(Ground)으로 사라졌다.

 

* Playing God : 도덕(Ethics)에 관한 토론(debate)에서 유명한 주제로 논란의 소지가 있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human)이 누가 살고 죽을지를 정하는 상황의 아이러니를 표현하는 문구이다. 

글: 정은 작가

Identification and Creation

Object Name / Natural Cup

Work Type / TABLE WARE 

Year of design / 2016 FW (1st generation) 

 

Physical Descriptions

Material /  Celadon Porcelain

Dimensions / S  Ø55 x 80mm / M Ø65 x 100mm / L Ø70 x 120mm​​​​

Country / Made in Korea

 

Contexts and Rights

Produced by  STILL LIFE

Designed by STILL LIFE

Managed by Nari Kwon

written by Jungeun Jacka

photography by Suk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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