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움직이는 책장

 치이익 끼리릭 끼리릭 철컥 철컥!

나, 문지혜. 지금 런던에 거주하며 런던대학 영문과 학사(BA) 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다. 한국에서 이미 영문과를 졸업하긴 했지만, 영문법 책을 달달 외우면서도 입이 도저히 안 떨어지는 대다수의 한국학생들과 마찬가지 문제 때문에 석사(MA)보다는 다시 한 번 학사과정을 밟아보길 결심했던 것이다. 지금 런더너(Londoner) 2년차로 첫 해에는 레스터스퀘어에 위치한 한 어학원에서 1년간 어학연수를 하며 영어 울렁증을 극복할 수 있었는데, 그맘때 즈음 차이나타운에서 넘어오는 이국적인 향신료 냄새가 된장만큼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세계 각국에서 몰린 다양한 인종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자국의 음식보다 외국 음식 레스토랑이 압도적으로 많은 런던의 식문화를 즐기며, 입장료 무료로 개방된 갤러리들에서 빈센트 반 고호의 작품을 감상하며 감성과 생각의 키가 쑥쑥 자라남을 느꼈다.   

새로운 문화 경험이 축적되어 몇 가지 행동 변화도 일어났다. 좀 더 모험적이고 좀 더  즉흥적인 일에 내 자신을 허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원에서 낮잠을 잔다던지, 결국 고호를 향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호 전시장에 가기위해 그날로 11시간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갔다 온 무박 2일의 여행이라던 지, 왼손으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던 지 하는 행동들이 그것들이었다. 사실 선천적 왼손잡이였는데 어렸을 때 할머니의 맴매 훈육에 의해 오른손잡이로 길들여졌던 것이다. 나는 점점 토끼 굴에 놀러가고 싶은 앨리스처럼 까치발을 세우고 총총거렸다. 

그런데 나의 성장과 변화는 학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만난 또 다른 거대한 장벽 앞에 갑자기 멈추게 되었다. 영어라는 것에 입이 떨어지고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기본 중 기본이었다면, 그 언어에 관해 심도 있게 공부하기 위해선 영어권 문화를 이해 할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이하는 매주 피드백 시간마다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담당 교수님의 날카로운 지적들 중 대표적인 두 가지 이다. 

1. 지혜! 너 지금 지구라도 구할 셈이니?(Don't try to save the world!) 의미를 모호하게 흐리지마(Don't be ambiguous)! 정확히 지정해(Be specific)! 범위를 좁혀야해(Narrow down)! - ‘거시기, 뭐시기, 그거, 그냥 저거’라는 표현이 산재한 한국의 언어문화와 영어는 매우 달랐다. 영어는 무엇을 말하던 가능한 구체적으로, 또 형용사나 관사로 지정하여 얘기해야 했다. 여기에서 바로 한글 문법에는 없는 정관사(the)와 부정관사(a, an)의 쓰임이 갈리는 것이다.  

2. 지혜! 너처럼 말하다가는 불나면 다 타 죽어! - 언어학자들이 흔히 하는 농담 중에 한국어와 같은 어문화권에서는 불나면 다 타 죽는 다는 농담이 있다. 서술이나 이유 이야기를 한참 한 다음에야 결론을 ‘짐작’할 수 있는 한국어와 결론부터 말하고 이유나 배경을 순서대로 나열하는 영어 문화는 순서 면에서 정반대였다. 

벽, 사방에서 조여 오는 것 같은 언어 장벽에 폐소공포증(Claustrophobia)을 느끼며 점점 작아지는 내 자신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맴매를 잔뜩 맞은 것처럼 아프기 시작한 왼손을 접어두고 다시 오른손으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6개월을 아버지 방에서 본 핑크플로이의 벽에 나오는 고통 속 인간 얼굴처럼 지내던 어느 날 아침 나를 조여 오던 한 마디가 나를 해방시켜주는 다른 얼굴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래 지구를 구하려 들지 말자(Don't try to save the world)! 어느 날 하루아침에, 단 한 번에 모든 문제를 고치거나 해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일까 찾아보고 하나씩 실력을 쌓자. 일상의 꾸준한 노력, 내가 할 수 있는 거기에 집중하자! 

나는 언어의 장벽을 무리하게 부수려 하기보다 그 벽에 괜찮은 책장하나 설치해 보기로 결심했다. 정리정돈, 깔끔을 지향하는 나답게 디자인은 최대한 심플하게, 그러나 칸은 충분하게! 일단 제일 가운데 칸에 지금의 내가 집중하고 있는 20세기 포스트모던 작가들의 작품집, 다음 칸에 다음 숙제에 해당되는 셰익스피어나 제인 오스틴 등 영어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대표 고전 작가들의 작품, 그 다음 칸에는 무지 파일과 매일 영작 연습을 겸할 영어 일기장을 두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칸에는 혹시 이 책들을 펴 볼 날이 있을지 모르지만 영어의 어원을 이해하기 위한 라틴어 공부 책들을 일단 진열만 해 보았다. 아! 여기까지 머릿속 정리를 마쳤으니 이제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해 볼까? 

여기까지는 지혜의 책장에 지혜의 의식이 닿는 부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지혜의 책장은 몰래 지혜의 의식이 닿지 않는 곳 까지 확장되었다. 책장의 오른 편에 또 다른 책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에는 단 두 권의 만 꼽혀있다. 한 권은 ‘언어의 늪’이라는 책이었고 나머지 한 권은 ‘지혜의 책’이라는 라벨이 달려있었다. 바로 오늘에는 전자의 크기가 후자보다 압도적으로 크기에 오른 쪽 책장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지혜가 잠을 자는 사이 변화는 일어나고 있었다. 

‘치이익 끼리릭 끼리릭 철컥 철컥!’

매일 밤 램(RAM) 수면 상태에서 뇌는 장기기억과 단기기억을 분류하고 복잡한 정신을 정리함으로 피로를 푸는 과정을 거친다. 언어의 장벽에 설치된 책장은 지혜의 이성으로 정리된 좌뇌와 감성적 상상의 우뇌를 정리하고 있다. 그렇게 지혜의 왼쪽 오른쪽 책장은 주인도 모르는 사이 매일 조금씩 움직이며 책들이 진열된 선반 사이 간격을 재조정 하고 있었다. 

 

 

 

좌와 우 : 좌뇌는 시각적, 언어적, 이성적인 능력을 우뇌는 청각적, 예술적, 감성적인 능력을 주관하는 기관인데 오른손을 사용하면 좌뇌발달에 그리고 왼손을 쓰면 우뇌발달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적인 한국의 문화는 ‘왼손잡이’를 선호하지 않기에 어릴 때부터 너나할것없이 오른손잡이가 되도록 ‘교육’받는다. 원래 왼손잡이 인데, 어른들의 훈육이나 문화에 의해 오른손 잡이로 키워진 사람들을 ‘선천적 왼손잡이’에 분류해 넣는다. 

 

글: 정은 작가

Identification and Creation

Object Name / L Shelves

Classification / Furniture

Work Type / OFFICE WARE 

Year of design / 2016 SS (1st generation) / 2016 FW (2nd generation) / 2017 SS (3rd generation)

 

Physical Descriptions

Material /  Anodized Aluminum

Color / Silver or Green

Dimensions / (W)1200 x (D)250 x (H)1960 mm

Country / Made in Korea

 

Contexts and Rights

Produced by STILL LIFE

Designed by STILL LIFE

Managed by VOY Studios

written by Jungeun Jacka

Manufacturered by ETT

photography by Suk Jun / Taejun 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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