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미생 (著者未生)

  김서라씨는 몇 해 전 40대 초반의 나이에 국내 굴지의 인테리어 잡지 편집장에 오른 인물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은 이직률이 높은 업계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그녀의 승진이 늦었다는 사실이고, 남들이 잘 모르는 사실은 어딜 가도 대기업 부장급 대우를 받는 그녀이지만 봉급은 겨우 $3,000를 웃도는 수준에, 무능한데다 자리만 오래 차지했던 이전 편집장에 질려 4번 사표제출하고 오너의 설득에 다시 집어넣은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이다.  

편집장이 되었다고 해서 특별히 업무가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전 편집장은 임기 말년에 개인 집필물을 핑계로 실무의 거의 대부분을 김서라씨에게 떠넘겼던 터라 그녀를 당황하게 할 새로운 도전은 거의 없는 셈이었다. 다만 진정 당황스러운 일들은 오랜만에 동창이나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올 때 발생했다. 개업식, 개소식, 런칭행사, 기타 등등의 뉴스가 전해 질 때마다 ‘#제발홍보해줘그램’이라는 해시태그를 본 것처럼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전에는 권한 없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었지만, 지금은 뭐라고 해야 하나?

오늘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약 10년 정도 연배가 어린, 우리 잡지에도 여러 번 소개되었던 여자 디자이너 한명과 점심 약속이 있다. 혹시 또 뭐 부탁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냉면을 먹자고 한 그녀는 냉면대신 만두를, 그리고 의외로 청탁대신 그녀의 꿈에 관해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길어진 만큼 자신은 120살까지 살며 세상에 굵직한 획을 긋고 싶다는 둥, 4차 산업 혁명으로 아시아의 개발도상국은 앞으로 5~10년 사이 문화, 예술 사업에서도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둥, 인테리어와 익스테리어를 나누던 공간의 바운더리는 다시 설정되어야 된다는 둥 한참을 혼자 떠들던 그녀는 숨이 찼는지 잠시 호흡을 늘이며 오늘 만남의 핵심인 것 같은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것은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입지가 적은 독립 디자이너들의 미래와 활동 방향성에 관한 것이었다. 

당연히 힘들지. 누군가의 지시로 움직이는 직장인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동력으로 불태우는 게 쉬운 일인가? 또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듣보잡 디자이너들이 실력만으로 목소리를 내고 족적을 남기는 것이 흔한일인가? 비록 직업군은 다르지만 나도 독립해서 살길이 있었으면 사표제출 퍼포먼스를 4번까지 하고도 다시 같은 책상에 앉지 않았겠지. 속으로 이렇게 외쳤지만 겉으로는 그냥 격려가 되는 말만 되풀이 해주었다. 

퇴근을 하고 돌아와 오늘 입었던 이세이 미야케의 플리츠 플리츠 블라우스와 타사키에서 콜라보로 출시된 한정판 흑진주 반지와 목걸이를 벗어 둔 채 임스의 의자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요즘 그녀가 스스로에게 붙여준 별명을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저자미생(著者未生). 27살 입사한 이래 약 천편의 원고를 썼지만 무엇 하나 온전히 내 것이 아닌 것 같고, 사표는 멋지게 4번이나 던졌지만 끝까지 관철시킬 배짱은 없던 나. 잠시 눈을 들어 오랫동안 전원조차 켜지 않았던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놓여있는 오늘따라 초라해 보이는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IKAE의 $199,00짜리 조립식 책상으로 임스 의자와 나름 어울리기는 했지만, 인테리어 디자인 잡지 편집장 책상으로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 다음날로 회사에 반차를 제출하고 책상을 사러 나섰다. 사실 그냥 평상시 동경하던 더치 디자이너 헬라 융게리우스가 디자인한 거대한 개구리가 한쪽 다리를 테이블에 쩍 올리고 있는 Frog Table을 질러버릴까 생각했던 차였기에, 큰 기대 없이 리빙샵들을 배회했는데 한 책상이 이상하게도 눈에 들어왔다. 첫눈에 특별한 디자인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무언가 익숙한 느낌의 여운이 있었다. 그게 무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의 추억에 관련 된 것이었다. 묵직한 피아노를 닮은 재질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연주하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두 개의 판이 X형태로 교차되며 만들어진 공간에서 어린 시절 동생과 숨던 책상 밑 숨기 놀이의 재미를 느꼈다. 어머니의 사랑이 나를 감싼 그 시간 속에, 작은 공간에 몸을 숨기며 온 세상이 나를 볼 수 없을 것이라 귀여운 착각에 빠졌던 그 상상력 속에, 그리고 이불하나에 안전함을 느끼던 그 순진함 속에, 나는 미생(未生)이 아닌 완생(完生)이었다. 

테이블이 배달된 그날로 책상위에 다른 아무것도 아닌 노트북을 올려놓고 정말 오랜만에 전원을 켜보았다. 그리고 순진한 완생의 마음으로 미완의 글을 썼다. 논리, 귀결, 합리, 목적이 있는지는 나중에 보아야 알일이다. 이내 문서의 저장을 마치고 잠시 휴식시간을 가지기 위해 노트북을 덮었다. 커피를 마시러 부엌 쪽으로 가다가 묘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책상위의 애플 로고가 수면모드에 들어가려던 찰나에 씨익 씨익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컴퓨터의 불빛과 더불어 책상에 영롱히 반사된 빛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며칠 전 만난 한 젊은 디자이너의 눈빛이 떠올랐다. 기억속의 그녀는 혼자 한참을 자기말로 무언가 질문을 던졌고, 바로 저 호흡으로 숨을 고르며 나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뻔한 클리세의 답변만 내뱉었지만 아마 내심 신경 쓰고 있었나보다. 아마도 계속 무언가 해줄 말을 찾고 있었다. 바로 ‘나’의 답 말이다.

책상 위와 책상 밖의 긴 호흡, 자신의 질문의 답을 듣길 기다리는 누군가처럼, 또 다른 인생의 숙제의 답을 갈망하는 누군가처럼..

A Bittersweet Life

 

 

* 미생 : 2014년 방영된 한국 드라마로 꿈보다는 현실을, 나 자신의 개성보다는 조직문화를, 그리고 과정보다는 결과에 얽매이게 되는 대부분의 한국인의 삶을 그려낸 시대극이었다. 

 

글: 정은 작가

Identification and Creation

Object Name / X Table

Classification / Furniture

Work Type / OFFICE WARE 

Year of design / 2016 SS (1st generation) 

 

Physical Descriptions

Material /  Eucalyptus Wood, High gloss clear coating,Patinated Copper

Size / Variety

Country / Made in Korea

 

Contexts and Rights

Produced by STILL LIFE

Designed by STILL LIFE

Managed by VOY Studios

written by Jungeun Jac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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